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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구려 임금의 호칭 '태왕'에 대하여 등록일 2006.07.18 14:07:41
글쓴이 김용만 조회수 18847 추천수 522
내용

  고구려 임금의 호칭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우선 떠오르는 단어는 왕(王)이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영양왕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를 제국이라고 알고 있다.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할 때 왕이라는 호칭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것은 흔히 제국의 임금의 호칭인 ‘황제(皇帝)’라는 칭호 때문이다. ‘왕보다는 황제가 높은 임금이다’ 라는 말이 상식처럼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다. 진시황제가 최초로 사용했다는 황제라는 말은 각 국의 왕들보다 상위에 있는 임금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임금은 왕이었지만, 명, 청의 임금은 황제였다. 조선의 왕은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다.

  따라서 ‘왕은 제후국의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는 것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 역사에서 제후국이 아닌 시대에는 왕이 아닌 황제란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를 제외한 고려, 삼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드라마에서 임금의 호칭을 황제로 사용하는 예를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방영중인 ‘주몽’ 드라마에서는 중국 현토군 태수에게도 쩔쩔매는 존재로 등장하는 부여에서도 황제 운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황제’ 콤플렉스가 실로 대단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막강한 국력을 과시한 고구려의 지배자가 그저 왕이란 칭호만 사용했다면, 조선시대 왕들처럼 중원의 황제보다 낮은 위상의 가진 지배자였다는 말인가? 그럼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구려는 황제란 칭호를 사용한 바 없으니, 중원의 여러 나라의 제후국이었다는 것이 옳다는 것인가? 임금의 호칭이 곧 한 나라의 지배와 종속까지 결정한다는 생각은 많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문제를 확대하지는 않기 위해 거론하지는 않겠다.  

  중국학자의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왕(王)이란 글자는 ‘천지인(天地人)을 꿰뚫어 통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한다. 본래 왕이란 말은 낮은 지위를 가진 제후를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후대에 왕보다 상위의 개념이 생기면서, 왕의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황제란 말을 사용해야만 그 나라가 제국이며,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다고 볼 수도 없다.

  로마제국의 임금 등 제국을 다스렸던 사람의 호칭인 emperor의 번역을 우리는 황제라고 한다. 그러나 emperor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은 황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 emperor를 가리키는 용어에는 우선 선우(單于)란 말이 있다. 흉노제국의 임금의 칭호인 선우는 강(姜), 저(低), 선비(鮮卑)족에서도 사용할 만큼 보편적인 제국의 지배자 호칭이었다. 선우 아래에는 좌현왕, 우현왕 등 여러 왕들이 있었다. 선우는 황제와 동격이었다. 그래서 장성 북쪽은 선우가, 남쪽은 황제가 다스린다는 기록도 있다.

  가한(可汗)도 마찬가지다. 가한은 5세기 유연(柔然)제국부터 사용하였던 호칭으로, 돌궐족도 사용한 호칭이다. 그리고 몽골족이 사용한 ‘칸’도 있다.

  그럼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의 황제와 여러 북방민족의 선우, 가한, 칸 뿐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태왕’이 있다.

  우선 고구려 관련 금석문에서 태왕의 사용례를 살펴보자.


  1. 광개토태왕릉비문 (414년 기록)- 8번 등장.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외에 태왕이란 호칭이 광개토태왕의 긴 이름을 축약한 호칭으로 사용됨. 여기서 태왕이 고구려 임금을 가리키는 칭호임을 알 수가 있다.

  2. 호우총출토 호우명 (415년)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3 모두루묘지 (5세기 초) - 국강상성태왕,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2회 등장

  4. 중원고구려비문 (5세기) - 고려태왕, 태왕국토. 2회 등장

  5. 서봉총출토 은합호명 (451년) - 덮개 내부, 외부 아래에 2번 등장.

  6. 태왕릉출토 벽돌명(4-5세기) -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7. 태왕릉출토 청동방울 (4-5세기) - 신묘년 호태왕 무(?)조령(?) 구십육


  고구려에서 태왕 호칭을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까지는 대개 4-5세기의 자료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태왕 호칭을 쓴 시점에서 고구려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의 제정은 황제와 같이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자처한 나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즉 연호 제정은 황제 권력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흔히 고구려의 연호 사용을 광개토태왕의 영락(永樂)이 최초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남아있는 기록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 이전에 사용했을 가능성은 남아있다. 태왕과 연호에 대해서는 고구려 보다 신라의 사례에서 그 관계를 보다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신라의 경우는 법흥왕 23년인 536년에 건원(建元)이란 연호는 처음 제정하였다. 그리고 551년에 진흥왕이 개국(開國)이란 연호를 사용했고, 568년에는 대창(大昌), 572년에는 홍제(鴻濟)를 사용했으며, 584년에는 진평왕이 건복(建福)을 제정했고, 634년에는 선덕여왕이 인평(仁平)을, 647년에는 진덕여왕이 태화(太和)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648년에 당나라와 외교 협상에 나서면서 사용을 중지하게 된다. 113년간 신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시점에서 신라의 임금의 칭호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신라의 임금의 호칭은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이 사용되다가, 지증마립간 4년인 503년에 왕으로 임금의 존호를 바꾸었다. 그런데 법흥왕의 경우 524년에 세워진 울진봉평비에는 그 자신을 탁부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하여, 갈문왕 등 다른 부족의 장들과 별반 차이 없는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때 왕은 신하들과 화백회의를 주관하지만, 신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위상으로 추대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28년 법흥왕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공인하는 성과를 거둔다. 즉 이때부터 왕권이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한다.

  535년에 씌어진 울주 천전리 서석의 을묘명(乙卯銘) 기록에는 성법흥태왕(聖法興太王)이란 글귀가 적혀있고, 539년에 씌어진 천전리각성 추명(追銘)에는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라는 말이 분명히 보인다. 즉 법흥왕이 태왕(太王)으로 지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법흥왕이 연호를 제정한 536년 무렵 신라의 왕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태왕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임금들은 그 이후에도 태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북한산순수비, 황초령순수비, 마운령순수비 등에는 진흥태왕(眞興太王)이란 말이 보인다. 예를 들어 ‘태창원년 세차 무자 21일 진흥태왕’ 이런 식으로 연호가 사용되고 태왕이란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즉 태왕과 연호 사용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신라가 태왕 이란 호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국력이 강해졌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만큼 자립심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신라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자국의 중심이란 생각을 갖고 있던 신라는 스스로 태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즉 이 무렵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간섭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특히 왕은 신하의 권력을 능가할 만한 강해져 있었다. 단양적성비에는 진흥태왕의 명을 받아 국정을 처리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왕권은 신하들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왕의 권력 강화에 도움을 준 것은 불교였다.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개념이 도입되고, 왕족은 석가족이란 인식이 부여되면서 왕은 신하들과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로 되어었다. 전륜성왕이란 의식은 자국의 왕이 불법을 전 세계에 퍼트리는 큰 사명을 가진 왕이다. 전륜성왕 의식을 가지려면 그 왕이 곧 천하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호도 제정하고, 태왕이란 호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라에서 사용한 태왕 이란 호칭은 곧 지상에서 최고의 지배자에게 부여하는 호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신라의 국력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신라의 자신감 표현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태왕이란 말은 고구려에서 먼저 사용했다. 신라는 5세기에 고구려 문화의 세례를 받은 나라인 만큼, 신라인이 생각한 최고의 지배자라는 말인 태왕은 곧 고구려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지배자의 호칭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 임금은 매금왕이고, 고구려 임금은 태왕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6세기에 와서 신라도 고구려 임금처럼 태왕을 칭한 것이다. 신라의 왕도 이제는 초월적 존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신라가 태왕 대신에 황제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황제라는 말은 법흥왕 당시 신라의 일반 백성들에게 의미 있는 용어라고 할 수가 없다. 법흥왕 시기까지 신라는 중원의 나라와 교섭이 거의 교섭이 없었다. 신라가 648년 이후 당과의 교섭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황제란 말이 신라사에서 의미가 있는 용어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황제란 말이 대중화되지 않는 특수 용어였다. 그러니 황제라는 말을 신라 임금들이 사용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 태왕이란 호칭을 사용한 임금에 대해서는 기록상으로 볼 때는 [모두루묘지]에 등장하는 성태왕(聖太王)이 가리키는 고국원왕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성(聖)이란 글자에 주목해보자. 고구려 임금을 더 높여 부른 성(聖)을 미칭(美稱)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호양왕(미천왕), 명치호왕(문자명왕), 양강상호왕(양원왕), 평강상호왕(평원왕) 표현에 등장하는 호(好)도 역시 미칭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의 정식 호칭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도 호(好) 글자가 있다.

  태왕과 왕에 대한 인식이 달랐음을 고려한다면, 호왕(好王) 역시 본래는 호태왕(好太王)인데, [삼국사기]에서 태(太)를 빼 버렸다고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평강상호왕(559-590)까지는 태왕 호칭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평원태왕의 아들인 영양 임금도 당시 고구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고려할 때 태왕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영양황제라는 표현이 아니라, 영양태왕이라는 표현이 당시 상황에서는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시노하라 히로카타,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 『한국사연구』125집, 2004년

 

 

- 기타 참고 자료 -

* 고려시대 황제 용어 사용.

  고려시대에는 임금을 가리키는 용어로 '황제'를 사용되었다. 고려 4대 광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황제임을 천명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대금(大金) 황제는 고려 황제에게 글을 부친다’ 라는 표현이 보이기도 한다. 개경은 황도(皇都)였고, 천수(天授), 광덕(光德), 준풍(峻豊)과 같은 연호들이 사용되었다. 원나라 침략을 받기 전까지 고려는 황제국임을 표방했고, 그것은 거란, 송, 금에서도 다 아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고려가 황제국 체제였음을 밝히는 논문들이 많이 나와 있다.


* 고려의 황제국 체제와 관련한 논문

윤영인, 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학회 11차 학술대회발표논문집]

박제우, 2005, <고려군주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학보] 20집.

노명호, 1999,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한국사연구] 105집.

김기덕, 1996,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 78집.              


* 삼국시대에 황제란 용어가 사용된 예는 없는가?

  기록상으로 볼 때 없다. 그래서 이것이 불만인 사람들도 많다. 황제란 칭호가 사용된 기록이 없는 이유를 김부식의 [삼국사기],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황제란 칭호를 기록에서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종의 희생양으로 김부식을 거론한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료에서 황제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많다. 


  먼저 소열제(昭烈帝) 논란이다.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爲慕容氏所破"(위궁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고 한다, 모용씨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즉 여기서 소열제는 고국원왕을 지칭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위서 고구려전을 보면

  "利子釗,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미천왕 아들 쇠(고국원왕)는 열제  때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기록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소열제’와 ‘쇠, 열제때에는’

  두기록을 비교해보면, 『위서』가 원본이고, 『수서』는 그것을 다시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제"는 북위의 건국자인 탁발규가 도무제라는 이름으로 칭제를 하면서 자신의 조상인 예괴를 추존하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장을 잘못 끊어 읽으면서 소열제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수서』의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수서]외에는 다른 기록에 고구려 임금을 제(帝)라고 기록한 것은 없다.


  둘째 고구려 임금을 오나라에서 선우라 불렀다는 기록이다.

  진수의 [삼국지] <오주전(吳主傳) 2> 233년 기록의 주석인 <오서吳書>에는 오나라에서 고구려의 동천왕(宮)을 선우로 삼았다는 기록(拜宮爲單于)이 있다. 오나라에서 고구려 궁을 그 나라의 임금으로 인정한다는 간단한 표현인데, 왜 굳이 선우라고 했을까?

  당시 오나라는 위나라를 견제할 목적에서 고구려와 우호관계, 더 나아가 동맹관계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위나라 북쪽에 있는 나라와 오나라의 국교가 열렸다는 것이 오나라에게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실체를 정확히 모른 가운데 위나라 북쪽의 유목민들이 사는 사용하는 호칭인 선우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다른 기록들에는 고구려 임금을 선우라고 한 기록이 없다. 선우가 고구려 임금의 호칭이라고 볼 수는 없겠다.


  삼국시대에는 ‘황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각국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와 신라 등은 황제가 아닌 ‘태왕’ 호칭을 사용하였고, 태왕이야 말로 진정으로 고구려, 신라 등에서 사용한 진정한 왕중의 왕, Emperor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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